탐서일지 #23. 김애란, 『비행운』 I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닌, 그 일부로 존재한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속 저 문장이 김애란의 《비행운》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낀다. 문장은 책과 일상을 건너 또 다른 문장들을, 우리가 간과한 삶의 여러 측면들 혹은 여러 삶의 측면들을 살포시 들어올려 그 흔적들을 보인다.
탐서일지 #23. 김애란, 『비행운』 I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닌, 그 일부로 존재한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속 저 문장이 김애란의 《비행운》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낀다. 문장은 책과 일상을 건너 또 다른 문장들을, 우리가 간과한 삶의 여러 측면들 혹은 여러 삶의 측면들을 살포시 들어올려 그 흔적들을 보인다.
탐서일지 #22.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 II
당초 쿤의 물음은 과학 일반에 대해 국한되었지만, 우리는 그의 의심을 교육과 진리 일반으로 확장할 줄 알아야 한다. 진리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가? 교육은 정말 그런 진리를 가르치는가? 인간의 지성 전통은 교육이 가르치는 바로 그 방식대로 진행되어 왔는가? "Veritas Lux Mea." 저 모토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우리는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다.
탐서일지 #21.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 I
객관성과 과학. 대중은 객관성의 대명사가 곧 과학이라고 생각하기에, 과학적 사고를 통해 그 어떠한 주관에도 치우치지 않은 판단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말 과학은 그러한가? 과학은 정말 믿음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과학이 절대성의 화신이라는 지위를 획득한 오늘날, 우리에게는 위험한 질문을 던질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6. 2025. 4. 1. ~ 2025. 4. 22.
《사상계》에 실린 계엄과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보며 나는 우리 사회의 다수에 결여된 것은 철학함이라고 다시금 생각해본다. 의심, 사유, 비평. 이 세 가지가 결여된 곳에서 압제는 상식이 되며 반대 의견과 토론은 봉쇄된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철학자〉로 살다가 죽고 싶다는 당초의 소망을 끝까지 되새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결국 남는 것이란 ‘이게 진짠지 영환지’ 모르는 상태일 뿐일 것이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5. 2025. 3. 10. ~ 2025. 3. 31.
16년이라는 방황 끝에서야 나는 겨우 깨닫게 되었다. 안쪽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나 오랫동안 애써 무시하거나 잊기로 결정해버렸다는 것을, 지금 나를 올려다보며 흐느끼고 있는 이 어린 아이에게는 그저 따뜻한 품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다시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동안 내가 걸어온 저 시간선들을 모조리 거쳐서, 그 끝에 마침내 도달한 나 자신을 토닥이면서.
동상이몽 #14. 상록수
나는 국회의장의 문장들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행간에 숨은 수많은 역사를, 오늘의 민주공화국의 기반을 위해 흘렀던 수많은 피들을 생각해본다. 수없이 반복되어온 저 질문, "국가란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생각해본다. 늦지 않게 나는 그의 말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음을, 여전히 문장들은 이어지고 있음을 떠올려낸다.
탐서일지 #20.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III
전례없는 시간, 전례없는 사유, 전례없는 회복. ― 철학적 사유가 〈죽음〉과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운 지금,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되짚어본다. 나는 방금 막 〈우물〉에서 빠져나왔다. 불타고 있는 〈숲〉과 아침을 기다리는 〈초원〉 사이에 자리한, 모든 인간이 가진 그 〈우물〉로부터.
고등학교의 숲
조금 전, 대략 6년 전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학들을 톺아보러 올라온(또는, '끌려온') 경남과학고등학교 학생들과 대면하고 왔다. 그 시간은 아무리 길어야 15분 남짓으로 길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설 수 있게 된 것에는 총 5년의 시간이 걸렸음을 나는 알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씁쓸했다. 5 ~ 6년이 지나서 그렇겠지만 현장에 있는 사람들 중 내가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고 연단에 도열했던 학생들은 대부분 새내기거나 이제 막 2년차를 맞이하고 있었기에 나는 마치 아스라이 멀리 떨어진 이름 모를 공간에서 혼자 외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각오하고 있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니까 내가 대학을 졸업할 시기에 진입함과 동시에 고등학교도 이제 낯설어질 시기에 진입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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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민음사. 2024. p. 567.
조금 전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의 마지막 두 문장.
책을 덮으면서 나는 이 두 문장이 어쩌면 최근 나에게 벌어진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한 어떤 응어리를 요약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나오코와 나, Bill Evans와 Chet Baker
조금 전 《노르웨이의 숲》의 10장을 모두 읽은 뒤, 제11장으로 넘어가면서 첫 장을 읽은 직후에 내가 직감했던 바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
상상력의 결여
조금 전 《노르웨이의 숲》을 읽은 것처럼 새벽에 소설을 읽을 때면 문득 처음 내가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상상력의 결여'. 그 당시 나의 이러한 의사의 바탕에 깔린 문제 의식은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만으로도 벅차다고 생각했던 (실제로도 극한을 향해 가고 있었기도 했다) 그 때의 나는 어느 사람을 보든, 어떤 텍스트를 보든, 아니면 어떤 문제를 보든 그 상황을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내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
탐서일지 #19.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II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 《노르웨이의 숲》은 이 문장에 담긴 인간 존재의 근간에 자리한 두 개의 항에 주목한다. 〈죽음〉, 그리고 〈삶〉. 인간은 이 둘의 경계에 놓인 존재이기에 가운데 자리한 〈우물〉 옆에서 질문을 던진다.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마침내는, "왜 인간은 자살하지 않는가?"라고.
탐서일지 #18.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I
인간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타인에 대해서는 또 어떨까? 그러나 우리는 오직 자신과 타인 모두를 타자로써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최초의 단절, 즉 〈상실〉은 여기서 시작된다. 철학, 문학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학문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갈 때 항상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4. 2025. 3. 1. ~ 2025. 3. 4.
"과거의 자신도 나 자신이다."라는 저 당연한 문장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들어오는 때가 있다. 문장은 불꽃을 만들고, 불꽃은 끌어안으라고 외친다. 나는 니체 · 마그리트 · 바흐가 하나로 이어질 수 있음을 느낀다. 호프스태터가 괴델 · 에셔 · 바흐가 하나로 이어짐을 느꼈듯이. 《하얀 문》을 열 때가 된 것이다.
낙서 #3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 55.
인간은 죽음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을까? 누군가의 생물학적 죽음 뿐만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가능한 모든 죽음에 대해서 말이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가 없기에 인간은 그저 죽음이 어떤지 그의 경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더 이상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는 경험. 대상의 죽음에 반드시 수반되는 바로 이것, 대상과 관계되는 자극이 불가능한 것으로 전환되는 바로 이 순간을 우리는 〈상실〉이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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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2
Memento Mori.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불편하지만 분명한 참인 명제. 사람들은 자신이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일상 속에서 잘 떠올리지는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떠올리면 마음속 한 구석에서 무서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도 있지만, 자신에게 달려들어오는 일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것이 우리 생의 일상이라 죽음을 떠올리는 것 또한 하나의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미키 17》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언컨대 〈죽음〉이다. 그러나 이 키워드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질문들이야말로 이 키워드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주기 때문에, 나는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몇 가지 시니피앙들을 하나씩 열거해야 한다. 이들 시니피앙들은 어느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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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53. 하얀 문
자신의 심연으로 뛰어든 사람이 마주하게 되는 문이 하나 있다. 인간 정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이 문 앞에 선 모든 사람들은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무엇을 하든 그 자리에 장엄하게 서 있는 저 잔인한 문에게 나는 〈하얀 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문을 들여다보며 나는 다시금 묻는다. "문을 열 것인가, 열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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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문
철학은 기본적으로 문을 여는 것이다.
문장은 단순하지만 가지는 무게는 중대하다. 문장은 짧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시간은 그렇지 않다. 문장은 쉽게 읽히지만 그 배경은 그렇지 않다. 나는 지난 4년 동안의 이 대학 위에서 내가 비틀거리며 걸어온 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가느다란 실이 바로 위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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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3. 2025. 2. 4. ~ 2025. 2. 25.
인간은 그의 일부분으로부터 단절된 채 살아간다. 그는 영원히 스스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사실이 그를 인간으로 만든다.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저 세계, 저 간극을 어떻게든 봉합하기 위해 비틀거리는 인간을 인식할 때마다 나는 바로 그 간극 위에서 치열하게 질문해온 지난 4년을 회상하게 된다.
경화수월 #5. 《OMORI》, 제4주차 ‘하루 전’ 모임 질문지
지난 시간의 물음은 여전히 이어진다. 맨 처음부터 묻고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자의적으로 그어진 경계들이 허물어지고 반대편을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말의 의미에 전율하게 된다. 문 앞에서 공포와 불안을 느끼는 인간의 운명은 영원하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인간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된다.